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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쇼케이스 앞에서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관람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6년 3월 20일 — 6월 28일

전시장을 나서며,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물음이 따라왔다. 죽음을 꼭 저런 방식으로 잔혹하게 표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16세 소년의 흑백사진이었다. 잘린 사람의 머리 옆에서 웃고 있는 그 소년의 정서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일도 그렇거니와, 그 작품을 무분별하게 마주하는 젊은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일부 관람객의 모습에서 걱정스러운 부분이 나타났다.
만약 내 자식이 저 16세 소년처럼 잘린 사람의 머리를 놓고 웃고 있는 정서를 지녔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부모의 자리에서 본다면, 그 사진은 작품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정서에 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이 미술관 입구에서 관객에게 던져진다는 사실 자체가 무겁다.
허스트가 내게 말하고 싶은 것이, 죽음에 대한 단상이 아닌 잔혹함인가. 그러한 인상은 비단 16세 소년의 사진뿐 아니라 전시 뒷부분에 이르도록 곳곳에서 반복된다. 한 작품의 예외적 충격이라면 나는 그 한 작품에 대해서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시 전체의 정서적 무게중심이었다.
몇 자리를 짚어두자. 3부에 들어서면 수천 마리의 나비 날개가 색별로 분류되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회화로 박제되어 있다. 빅토리아 시대 자연사 박물관의 만다라처럼 정연하게 줄지어 박힌 날개들 앞에서, 나는 이것을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 한참을 망설였다. 한 마리 나비의 죽음이 아니다. 수천 마리의 죽음이 도안이 된 자리이다. 도안의 정연함이 죽음의 양을 잊게 만든다. 잊게 만드는 일이 작품의 의도라면, 나는 그 의도에 동의하기 어렵다.
서울박스 한가운데에는 〈Myth〉 두 점이 놓여 있다. 한쪽 작품은 흰 유니콘의 형상이고, 그 맞은편 다른 한 점은 같은 짐승의 가죽이 벗겨져 근육과 뼈가 노출된 형태이다. 작가의 의도는 명백하다. 신화의 표면과 그 이면, 아름다움의 이쪽과 죽음의 저쪽. 그 의도는 이해된다. 그러나 한 동선 안에 그 양면을 동시에 마주하는 일은 다른 종류의 일이다. 신화의 이면이 학습의 도구로 마련된 자리에 한 마리의 짐승이 실제로 가죽이 벗겨진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그 사용 자체에 대한 질문은 작품의 의도가 답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For the Love of God〉. 다이아몬드 8,601개가 박힌 백금 두개골이 어두운 방의 진열장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작가는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최대치가 다이아몬드라 했고, 그 완벽함이 우스꽝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그 말대로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진열장 앞에서 내가 본 것은 우스꽝스러움이 아니라 사치였다. 사치를 통해 죽음을 비판하는 것과, 사치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것 사이에는 미세한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어느 쪽에 있는지를 가늠하기에 다이아몬드의 빛은 너무 강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의문이 겹쳐진다. 사치의 빛 너머에 진본의 문제가 있다. 포름알데히드라는 매체의 한계로 인해 이미 한 번 부패해 다시 만들어진 사물들을, 마치 처음 만들었을 당시의 작품인 것처럼 전시하는 일이 과연 맞는 일인가. 관객은 처음의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가, 다시 만들어진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가. 작품의 일자란 발상의 일자인가, 제작의 일자인가. 미술관이 어느 쪽을 채택했는지, 캡션의 한 줄이 그 모든 것을 말해주거나 침묵한다.
이런 자리들이 전시 곳곳에서 같은 무게의 인상으로 반복된다. 일일이 다 적지 않을 뿐이다. 잔혹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고, 죽음은 한 작품이 아니라 모든 작품의 표면이다.
그리고 가장 무겁게 남는 풍경이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헛된 것이라는 주제 앞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리고 젊은이들은 그 안에서 예쁜 것들을 찾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해골 앞에서, 나비 만다라 앞에서, 분홍과 황의 벚꽃 회화 앞에서, 사람들은 헛됨의 도상을 자신의 SNS의 한 컷으로 옮긴다. 헛되다는 인식이 그 자체로 헛되지 않은 콘텐츠가 되는 회로. 작가의 주제와 관객의 행위 사이에 이만큼 깊은 균열이 있는 전시를 나는 오랜만에 본다. 한쪽에서 죽음의 무게가 짓눌러도, 반대쪽에서 카메라는 가벼워질 줄을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의심이 든다. 잔혹은 충격이고, 충격은 화제이며, 화제는 매표 수익이다. 헛됨조차 매표 수익이 되는 자리에서, 잔혹이 동일한 회로 안에 들어 있다고 의심하는 일은 부당하지 않다. 허스트가 저 잔혹을 마케팅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작가가 그 회로를 자각하고 무대화하는 것인지, 그저 활용하는 것인지를 가리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이라 해도, 회로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접하면서, 이 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쇼케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도 상품이고, 동선도 상품이고, 그 동선 안에서 사진을 찍는 관객의 풍경마저 미리 설계된 상품의 한 부분이다. 책임의 주체는 허스트와 미술관이며, 관객은 그 풍경 안에 배치된 한 요소로 보일 뿐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자리에서 내가 본 모든 것은 한 상품이었고, 이 글은 그 상품 전체에 대한 비평이다.
그 쇼케이스 안에서 작가가 내건 질문 — 죽음, 헛됨, 진본 — 의 무게가 가벼워질 때, 그 가벼움의 책임은 풍경의 한 요소로 들어선 관객이 아니라 그 풍경을 설계한 자에게 있다. 답해야 할 자도 그쪽이다. 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보고 나온 한 관객이라도 적어두는 일이 남는다. 이 글은 그 적어두는 일의 작은 첫 자리이다. 답이 아니라 의심으로 적는다. 답이 없는 것이 미술의 한 가능성이라 해도, 의심을 적는 일은 답이 있는 것처럼 살아가기 위한 한 사람의 정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