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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에 대하여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감독 셀린 시아마 주연 노에미 메를랑, 아델 에넬 2019 · 프랑스 · 119min 칸영화제 각본상 · 퀴어종려상
18세기 프랑스 브르타뉴의 외딴 섬.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화가 마리안느와 결혼을 앞둔 귀족 여성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 소피 — 세 여자가 함께 보내는 짧고 고요한 시간을 담은 영화다.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사실 내게 영화 투자 심사를 해본 경험이 딱 한 번 있다. 아주 오래전, 지인을 통해 우연히 의뢰가 들어왔는데 우리 회사는 영화 쪽 투자를 하지 않아서 별도의 담당자가 없었다. 그래서 IT를 담당하고 있던 내가 대본을 받아 들고 심사를 했고, 결과는 캔슬이었다. 그때 나의 기준은 그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해서 투자 회수가 될 것인지였을 뿐, 예술성에 대한 심사는 능력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 오래된 기억이 새삼 떠오른 건, 이 영화가 내가 지금까지 봤던 영화 중 제작비가 가장 적게 들어간 영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화려한 세트도, 특수효과도, 압도적인 스케일도 없다. 그냥 섬, 저택, 세 명의 여자, 그리고 바다.
처음 봤던 날은 밤늦게, 몸이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영화의 삼분의 일이 지나도록 대사도 별로 없고, 배경음악도 없고, 무언가 특징적인 장면도 없이 그냥 공백 같은 상태가 이어졌다. 서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여백. 그것이 다였다. 잠이 쏟아지는 것을 참으며 보다가 결국 잠들어버렸다. ㅎㅎ
다음날 다시 처음부터 차분히 앉아 봤다.
같은 영화인데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다. 영화라기보다 수채화 같은, 회화적인 느낌이었다. 장면 장면이 그 자리에서 바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무언가 계속 묵직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알겠다'가 아니라 '느껴진다'는 감각이 앞선다.
영화 내내 눈에 밟혔던 것이 있다. 세 여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코르셋처럼 꽉 조인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나는 그 의상이 단순한 시대적 복식이 아니라고 느꼈다. 사회가 그들의 몸에 씌워놓은 무언가였다. 그래서 그 의상을 잠깐 벗어던질 때마다 화면 속 여성들은 억압과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처럼 보였다. 첫날 밤 마리안느가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벽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그 장면은 그녀에게 진짜 쉬는 시간이었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여백이 중심이고, 그 여백으로 감독은 관객과 만난다. 그 중심에 '응시'라는 단어가 자리한다.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보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영화 내내 흐르는 정적과,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들이었다. 감독은 그 응시를 사랑의 언어로 표현했다. 주인공을 두 사람으로 좁혀 보면 사랑이라는 말이 제일 어울린다. 그러나 세 번째 여자 소피까지 포함하면 달라진다. 소피는 하녀이고 엘로이즈는 아가씨다. 밖에서는 신분이 다르다. 그러나 부엌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책을 읽고, 서로의 삶에 깊이 들어갈 때 — 그 자리에는 신분이 없다. 세 사람은 그냥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같은 여자들이다.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그것이 사랑보다 더 넓고 더 근본적인 것 — 나는 그것을 진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 자신에 대한 진심이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에 대한 진심이기도 해야 한다. 영화는 그 진심을 응시로 그렸다.
마리안느가 처음 그린 초상화와 두 번째 그린 초상화는 너무도 달랐다. 첫 번째는 죽어있는 그림이었고, 두 번째는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취미로 사진을 찍어왔다. 주로 인물사진을 찍지는 않지만, 인물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들은 모델과 처음 만나 곧바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고 한다. 먼저 밥을 함께 먹거나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서로의 얼굴을 익힌다. 그런 시간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모델의 살아있는 표정을 담을 수 있다고, 나는 오래전에 들었다. 영화에서 엘로이즈가 웃기 시작한 것도 마리안느에게 감정이 생긴 이후였다. 카드놀이 장면에서의 표정 변화는 정말 극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초상화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궁금해서 조금 더 찾아봤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다. 여성 감독인데, 영화 속 엘로이즈를 연기한 배우와 실제 연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영화가 다시 읽혔다. 감독은 자신의 감정을 마리안느 역의 배우에게 투영시켜 작업했을 것이고, 엘로이즈 역을 맡은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느꼈던 감정은 어쩌면 연기가 아니라 감독을 향한 진짜 자신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것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었고, 앞서 봤던 응시의 장면들이 그제야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사진을 찍을 때 이런 생각을 한다. 내 사진으로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려면, 먼저 내 사진이 진실되어야 한다. 내가 거짓으로 만든 감정으로는 상대를 감동시킬 수 없다. 아마도 이 영화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감독이 금지된 사랑을 택한 이유가 그것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억압된 여성의 문제, 지워진 이름들,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욕망. 그 겹들이 모두 이 영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 한 가지였다 — 같은 눈높이에서 진심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것. 어쩌면 감독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하기 위해, 그것이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을 골랐는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것들, 잊혀진 묘지, 무너진 성당, 구룡마을의 고양이들 — 며칠 전 오픈한 사진집에 담긴 것들이다. 어두운 사진들이 많다. 그런데 그 사진집의 첫 번째와 마지막 사진은 둘 다 걷는 사람이다. 웅덩이 반영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안개 낀 철로 위를 홀로 걷는 사람으로 끝난다. 폐허가 있고 망각이 있지만, 그 앞뒤에 사람이 걷는다.
그 한가운데 어딘가에, 서로를 꼭 안는 두 사람이 있다. 무너지는 것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온도다. 창틀 너머로 환하게 터진 꽃들도 있다.
물론 이 영화와 내 사진집을 같은 선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당돌한 일인지 나도 안다. 칸에서 각본상을 받은 영화와 흑백사진 22점 사이의 거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 두 작품이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6년 동안 시골의 어느 마을에서 할머님들과 함께 지냈다. 1960년대에 육영수 여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만든 마을이었다. 오랫동안 바깥 세상과 고립되어 살아온 분들이었고, 평생 남의 시선을 아래에서 받아온 분들이었다. 그 분들 곁에서 같은 눈높이에 서는 데 6년이 걸렸다.
상대를 내려다보지도, 올려다보지도 않고 — 같은 눈높이에서 진심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그림이 되고, 사진이 되고, 사랑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낯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