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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지형을 살려 만든 왕실의 휴식처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성종 대에 건립된 창경궁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일것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고 후원이 훼손되어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1610년(광해2)에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인조, 숙종,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다.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한 솜씨이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芙蓉池).애련지(愛蓮池),관람지(觀纜池),옥류천(玉流川) 영역이 펼쳐진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깊숙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뒷산 응봉으로 이어진다. 서쪽 깊숙한 숲 속에 대보단이나 신 선원전 같은 제사시설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림용이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이에 비해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체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비원인가, 후원인가?


창덕궁 후원에는 특별히 붙여진 이름이 없다. 한국의 전통 정원은 건물의 앞을 비워 두고 뒤편에 만들었다. 창덕궁도 그 예를 따라 궁궐 뒤편에 정원을 만들고 '후원(後苑)'이라 부르기도 했다. 구한말에 궁 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비원(秘院)을 두었는데, 1904년부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등장한다. 비원이란 명칭이 일반인에게 익숙해진 것은 금원이었던 이곳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창덕궁 후원이 비원으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이때문이다.



쓰임새가 다양했던 후원


후원은 왕가의 휴식과 산책을 위한 곳이지만, 여러모로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자연 풍광을 느끼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물로이요, 과거시험을 비롯한 갖가지 야외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관하는 군사훈련이 자주 실시되었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다. 연못에서 낚시를 하거나 배를 띄우기도 하고 꽃구경을 하였으며,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도 하였다. 대비를 모시는 잔치, 종친이나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 등 임금이 주관하는 잔치도 자주 열렸다. 또한 왕은 이곳에 곡식을 심어 농사를 직접 체험하고, 왕비는 양잠을 직접 시행하는 친잠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창덕궁 후원 가는 길창덕궁 후원 가는 길

부용지와 주합루 전경부용지와 주합루 전경

어수문을 통해서 계단을 오르면 주합루와 좌측의 사향각을 만날 수 있다.어수문을 통해서 계단을 오르면 주합루와 좌측의 사향각을 만날 수 있다. 주합루 1층은 규장각이었으며, 윗층은 열람실 겸 누마루다.


어수문앞에서 올려다본 주합루.

가운데 큰 문은 임금만이 통행이 가능하였고,

신하들은 좌우의 작은 문으로 통행하였다고 한다.

왕권이 강화되었던 정조 대의 단면을 볼수 있는듯 하다.

어수문 오르는 길.어수문 오르는 길

주합루 앞에 있는 큰 연못을 부용지라고 한다주합루 앞에 있는 큰 연못을 부용지라고 한다



어수문어수문




영화당에서 내려다 본 부용지 풍경.영화당에서 내려다 본 부용지 풍경. 맞은 편에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 보인다.

영화당 툇마루에 앉아서 셀카찍는 두 친구.영화당 툇마루에 앉아서 셀카찍는 두 친구. 좌측 기둥뒤에 보이는 건물이 부용정(芙蓉亭)이다

나도 젊었을땐....나도 젊었을땐....


최근에 두번에 걸쳐서 창덕궁 후원을 갔었네요.

이곳은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곳인데요.

근사한 고목들이 빽빽한 울창한 숲속에 각종 정자들의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더해져서 ...

너무나 근사한 한폭의 그림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201404 창덕궁 후원 부용지와 주합루 그리고 영화당



내용 출처 : 문화재청이 발간한 관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