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신앙촌의 초기 집성지로 1957년 11월에 모두 13평형으로 처음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건설 현장의 건설대원들 : 당시 우리나라는 외국의 원조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로 핍박이 가해지는 중에 외부의 도움 없이 은혜로 하나 된 천여 명의 교인들이 신앙촌 건설에 자진하여 모여들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모인 교인들을 가리켜 건설대 또는 건설대원이라고 불렀다.
시온복을 입은 건설대원들 : 신앙촌 건설대원들은 1958년 1월부터 ‘시온복’이라는 것을 착용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 형식의 작업복으로 상의는 카키색, 하의는 초록색의 바지로 멜빵이 달려 있어 활동하기에 편리했다. 이것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입었다.
신앙촌 전경 : 약 1년 만에 300여 동의 주택과 50여 생산 공장,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각 학교가 건설되어, 만여 명의 주민이 입주하였다.
- 1958년 2월 범박리에 주택 70여 동(1구) 준공
- 4월 초 · 중 · 고등학교 교사 준공
- 5월 5동의 아파트 및 각종 공장 건설
- 9월 2구, 3구 200여 동 주택 건설
- 1960년 초에는 해발 150m 노구산봉에 900여 평의 오만제단 완공
- 같은 해 10월 계수리에 42동의 주택 완공
- 1961년 7월 소사리에 10여 동의 주택 완공
건설을 위해 신앙촌 주민들이 돌을 나르는 모습 : 1957년 11월 소사신앙촌 건설이 시작되면서 1차 건설대로 들어갔는데, 저희 건설대원들은 배추 밭에 천막을 치고 숙소를 마련한 다음 건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작업 시간 중에도 찬송을 힘차게 부르며 일을 하는 저희들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저 기쁘고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야간작업 시에는 건설 현장 둘레에 횃불을 쭉 켜 놓고 일했는데, 그 모습 또한 장관이었습니다. 작업복으로는 국방색 멜빵바지와 베이지색 남방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소사신앙촌에 큰 우물을 파서 그 우물에 쌓을 돌을 나르던 때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오만제단에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돌을 하나씩 이고 우물 쌓는 곳으로 내려가 돌을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손바닥이 다 갈라져 피가 나도 한 사람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안수해 주셨던 하나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신앙신보 1999. 4. 11.>
소사신앙촌 건설대원이 2,000여 명이었는데 새벽예배가 끝나고 밤 12시까지 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하룻밤만 자고 나면 집 몇 동씩 지어졌습니다. 그 후 건설대원이 A, B반으로 나뉘어 A반은 주로 주택, B반은 제단 건축과 학교를 짓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은혜 가운데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힘들고 무거운 일은 저마다 하려고 나서다 보니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났으며,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선생’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남이 나보다 신앙적으로 앞섰다는 높임말이었습니다.
신앙촌 주민들의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은 새마을 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신앙촌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고 입주한 식구들은 생기와 활기로 가득 찼습니다. 팔도에서 모인 사람들이지만 한 식구 같았으며 범박리 골짜기는 찬송 소리가 넘쳤습니다. 어디 가나 은혜 창파로, 그곳은 세상과 다른 별천지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고 하루에도 수십 대의 관광차가 올 정도의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